칸트 철학에서의 '시간'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영화를 예로 들어보려고 한다.
① 90분짜리 영화가 있다고 해보자.
이제 90분을 '초'로 바꾸어보자.
1분은 60초이므로 90분은 5,400초가 된다.
5,400초를 '1초' 단위로 전부 분할을 해보자. 그럼 다음과 같이 된다. 1초, 1초, 1초, 1초, 1초, .....
'1초'가 총 5,400개가 있게 된다.
② 앞에서는 '90분짜리' 영화가 있다고 가정을 해보았는데, 이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 '10초짜리' 영화가 있다고 해보자.
이 '10초짜리' 영화를 '1초' 단위로 전부 분할을 해보자. 그럼 이렇게 된다. 1초, 1초, 1초, 1초, 1초, .....
'1초'가 총 10개가 있게 된다.
③ 영화는 시간이 1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2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3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일시정지'를 해보면 그러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각 시간에 해당하는 '어떠한 장면'이 있을 것이다. 각 '초'마다 그 초에 해당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들을 전부 다 합하면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1초일 때의 장면과 2초일 때의 장면은 서로 다르다. 3초일 때의 장면과 4초일 때의 장면은 서로 다르다. 5초일 때의 장면과 6초일 때의 장면은 서로 다르다. 만약에 90분짜리 영화라면, 60초일 때의 장면과 600초일 때의 장면은 서로 다를 것이다. 3,600초일 때의 장면과 5,400초일 때의 장면은 서로 다를 것이다. 이렇게 '어떤 특정한 시간'의 장면은 '다른 특정한 시간'의 장면과는 내용이 서로 달라진다. 시간이 달라지면 장면들도 달라진다.
한 편의 '영화'는 그 영화 속의 모든 시간들을 종합한 것과 같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인식하는 것은 그 영화 속의 모든 시간들을 종합하는 것과 같다.
각 시간마다 그 시간에 해당하는 장면들이 있기 때문에, '각 시간들을 종합하는 것'은 '각 시간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종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④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는 상영시간이 총 194분이다. 194분을 '초'로 바꾸면 '11,640'초가 된다.
영화는 시간이 '1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2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3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
'60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61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62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 '600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601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 '3,600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3601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5399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고, '5400초일 때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특정 시간'마다 그 시간에 해당하는 '어떤 특정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을 전부 다 합치면 한 편의 영화가 된다. 각 시간마다 그 시간에 해당하는 '어떤 장면'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을 전부 다 합친다는 것'은 '모든 시간들을 전부 다 합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떠한 영화'를 가리키면서 우리가 "이 영화는 타이타닉이다"라고 말을 할려면, 시간이 완결된 뒤에야(시간이 완결되어야만) 가능하다. '11,640초'가 흘러간 뒤에야 우리는 '어떠한 영화'를 보고 "이 영화는 타이타닉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영화를 두세 번 보고 나서는 어떤 장면만 보고도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여기서 설명을 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⑤ 이제 칸트 철학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위에서 '영화'를 예로 들었지만, 칸트 철학에서 인식 대상은 '영화'가 아니라 '사물'이다. '사물'은 '사과', '소금', '나무'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위의 '영화의 예'에서는 내가 '장면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여기서는 '공간들', '조각들'이라는 표현을 쓰려고 한다.
소금을 예로 들어보자. 소금이라는 표상에는 '희다', '각지다', '딱딱하다' 이러한 '지각들'이 합쳐져 있다. 위에서, '영화의 예'에서 나는 각각의 시간에 해당하는 각각의 장면들이 존재한다고 말을 했었다. 매 초마다 각각의 시간에 해당하는 각각의 장면들이 있다고 말을 했었다. 마찬가지로 '희다', '딱딱하다', '각지다'라는 지각들도 영화에서의 '장면들'처럼 어떤 시간 속에서 위치한다.
소금이라는 표상에는 여러 가지 표상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고 "이것은 소금이다"라고 인식을 하는 것은 소금이라는 표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표상들, 즉 '희다', '각지다', '딱딱하다'라는 '표상들'을 '어떤 동일한 주체(또는 객관)' 속에서 합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금'을 인식하는 것은 '소금이라는 표상'을 이루는 여러 가지 표상들, 즉 '공간들', '조각들'을 '어떤 동일한 주체(또는 객관)' 속에서 합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을 이루는 '공간들', '조각들'을 합하는 것인데, 그것은 '공간들', '조각들'이 위치해 있는 '시간들'을 합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화를 인식하는 것은 영화 속의 시간들을 순차적으로 종합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그 사물을 이루는 표상들(공간들, 조각들, 지각들)을 순차적으로 시간 속에서 종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사물을 이루는 표상들(공간들, 조각들, 부분들)을 모으는 일과 같은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사물을 이루는 표상들(공간들, 조각들, 부분들)을 모으는 일과 같은 것인데, 사물을 이루는 표상들(공간들, 조각들, 부분들)을 모으는 일은 사물을 이루는 표상들(공간들, 조각들, 부분들)이 속해 있는(위치해 있는) 시간조각들을 모으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시간조각들'을 순차적으로 종합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이 '시간조각들'을 동시에 표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시간을 완결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완결되어야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칸트 철학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칸트 철학에서 '시간조각들'은 현상과 동종적인 것(경험적 표상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시간조각들'을 순차적으로 종합하는 것은 '선험적 형식'인 '시간'이다.
'시간조각들'은 경험적인 것이고, '시간'은 선험적인 형식이다.
'대상 인식'이 가능할려면 '시간조각들'도 있어야 하고, 선험적 형식인 '시간'도 있어야 한다.
칸트 철학에 대한 더 많은 내용들은 다음 시간에 한 번 다루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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